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하이데거 (문단 편집) === 조교 생활 === 1916년 [[에드문트 후설]]이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왔을 때, 하이데거는 후설의 눈에 단순한 가톨릭 철학자로 비쳤고, 그렇기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1년만에 후설은 하이데거를 재발견했고,[* 후설의 조교는 원래 [[에디트 슈타인]]이었으나 그녀가 그만두자 새로운 조교가 필요했고 하이데거가 눈에 띄었던 것.] 하이데거는 후설의 조교가 될 수 있었다.[* 1917년에서 191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학기에 후설의 조교가 됨.] 그 무렵 1차대전에서 독일의 상황이 긴박해지자 1918년 하이데거는 결국 국민군 병사로 호출당해서 호이베르크 군단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았다. 후설은 이즈음해서 하이데거를 마치 아들과 같이 여겼기 때문에 지극히 사적인 마음을 담은 편지를 통해 함께 철학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그해 8월 말, 서부전선 기상관측대[* 아르덴 주 의 스당(Sedan)에 위치.]에 소속되어 전투 중 독가스 투입을 대비해 기상관측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맡는다. 그리고 11월, 연합군에 의해 독일이 패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 다시 철학에 몰두했다. 전후 하이데거의 최초 강의는 1919년 초 임시학기에 개설됐다. 이 젊은 조교는 첫 강의에서부터 후설을 넘어서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우선 후설의 말을 거론한다. " '직관'에서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 모든 것은, '~로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 말에 동의하나, 후설이 주변 세계를 너무 이론요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실 "실제 체험"에서 이론요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예외적 경우에 속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탁을 바라볼 때, 갈색 평면이나 네모 모양이나 높은 위치 등으로 요소를 분석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탁을 볼 때 자신의 키에 비해 너무 높은 교탁을 보거나, 그래서 그 위에 놓인 책을 보려는 순간 성가심을 느낀다. 즉, '주변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적인 것(das Bedeutsame)'을 사태 파악이라는 사유상의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서 직접적으로 얻는다. 직관으로 요소를 받아들이고 반성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주변 세계의 총체적 의미가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체험이란 그렇게 주변 세계로부터 직관적으로 주어진 의미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화(weltet)'한다. '교탁 체험'이라고 불리는 이 인상 깊은 예시에서 우리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찾아볼 수 없다. 세계는 요소들로 나누어져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근원적 태도'에서 '주변 세계'를 통해 총체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여 세상을 주체의 인식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데카르트 이래 근대철학의 인식론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 중 온갖 것을 경험했을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마저 숨을 죽일 만큼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웅장한 옛말과 비대해진 체계, 공허할 뿐인 학문적 난문들이 거친 손길로 치워지고, 그 대신 아주 기본적인 물음이 다시 제기된다. 우리의 주변 세계, 즉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주변 세계로 이해하기'의 철학은 논쟁적이면서 도발적이다. 몇 년 후 하이데거는 좀 더 장중한 어조로 이것을 표현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서둘러 달려가는 가장 가까운 것, 바라볼 때마다 새로이 낯설어지는 가장 가까운 것으로의 귀환."[* 『언어로의 도상에서』 中...] 이시기에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과 부딪치는 가톨릭 체계와 마침내 결별을 선언했다. 그것은 가톨릭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이데거는 강사 생활에서 얻는 돈으로 부족하나마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재단의 요구에 따라 가톨릭을 더 이상 옹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결심의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 철학은 인간의 불변성을 고려하지는 않지만 궁극적 의미 연관의 불변성은 요청한다. 그러나 [[빌헬름 딜타이|딜타이]]가 "의미와 의의는 인간 내에서야 그리고 그 역사에서야 비로소 생성된다"고 말했듯이, 철저하게 파악된 역사성의 이념은 일체의 보편주의적 유효성 요구를 파괴하고 만다. 이러한 통찰에 근거할 때, 그에게 있어서 기존 중세 가톨릭 철학의 방법은 문제적이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253~254] 이제 그는 그 자신만의 철학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개별자의 체험, 바로 "현사실적 삶(das faktische Leben)"으로부터의 철학하기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런 '현사실적 삶'의 대부분은 '염려(Sorge, 마음씀)'다. 따라서 그것은 삶의 불안으로부터의 철학이며, 방법적으로 고조된 자신의 불안정한 삶에 '깨어 있음'이다. 그것은 추락(Absturz)하면서 추락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제부터 이러한 철학에 온 정신을 기울여 열중한다. 1920년 봄에는 후설의 생일 파티에서 [[칼 야스퍼스|야스퍼스]]를 만났다. 둘은 갈수록 직업 학원처럼 되어 가고 있던 당시의 대학 현실에 함께 분노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합쳤다. 하이데거가 마음에 든 야스퍼스는 급기야 그에게 자신의 집에 며칠간 머물면서 함께 철학적 대화를 마음껏 나누어보자고 권했다. 하이데거는 이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2년 9월의 이 며칠간의 대화는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집중적인 철학적 사유, 우호적이고 느긋한 분위기, 함께 출발하고 시작해보자는 돌연한 감정. 야스퍼스가 회고록에서 밝히듯 이 모든 대화는 그에게 "강렬"했고, 둘은 금새 절친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